4화. 어느 책의 황태자
잠들지 못하는 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도, 기억도 아닌 것으로 밤을 새운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남자 때문이었다.
나를 알아본 것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두건을 썼어도 소개장에 상단 이름이 있었고, 골목에는 시녀와 호위가 딸린 마차가 서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가명 하나와 매듭뿐이었다.
서부군인가, 서부군을 거느린 헤스턴가인가.
어느 쪽이든 서부의 군인이 수도 한복판에서 가명으로 남의 장부나 뒤지고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았다.
질문은 지울수록 늘었다. 답을 하나도 찾지 못한 채 창밖이 새벽 어스름으로 옅어졌다.
아침종에 허겁지겁 식당으로 내려가자 가족들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내 앞으로 수프가 놓일 때까지 말이 없었다.
“내가 허락한 곳은 아르덴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운하를 따라 조금 내려갔을 뿐인데요.”
간밤에 미리 골라둔 대답이었다.
“마차로 한 시간을 조금이라고 하네.”
오빠가 빵을 뜯으며 아버지 편을 들었다. 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음 외출 전에는 지도에 경계를 그려주마.”
어머니가 빵을 잘라 내 접시에 놓았다.
“그래도 별일 없이 다녀왔으니 아침부터 그 얘기는 그만해요. 참, 네가 나가 있는 동안 대성당에서도 사람이 다녀갔단다.”
“대성당에서요?”
나는 빵을 뜯다 말고 어머니를 보았다.
“치료사도 보내 네 상태를 보겠다고 했어. 사고 난 곳이 케르딘 옛 성소와 가까워 교단에서도 마음을 쓰는 것 같더구나.”
“거절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찻잔을 든 채였다.
“두 달 동안 낫게 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제야 진찰하겠다고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군.”
어머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아버지가 교단 일이라면 유난스럽잖니.”
나는 접시 위로 시선을 내렸다. 미뤄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엘레인은 그날 왜 옛 성소로 갔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시 식탁 위로 접시 소리만 오갔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오빠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로렌츠가 온대요.”
오빠는 접시 너머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버지의 눈썹이 움직였다.
“호칭을 주의하거라. 이제 전하는 네 친구가 아니다.”
“……예. 황태자 전하께서 왕림하신답니다.”
오빠가 한 글자씩 눌러 고쳐 말했다. 어머니는 냅킨으로 웃음을 가렸다.
“어젯밤에야 순행에서 돌아오셨다더구나.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돌아오는 길에 들으셨다지.”
“그대로 돌아오면 사흘은 더 걸릴 거리였는데 로렌츠가 일정을 앞당겼다고 하던데요. 하여간 자기 동생도 아니면서 유난이란 말이야.”
왕림하신다던 황태자 전하는 어느새 도로 로렌츠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못 들은 척 차를 마셨다.
이름을 듣자 오빠를 따라 정원을 가로지르던 금발 소년이 떠올랐다. 내가 누운 동안에도 몇 번이나 이 집을 찾은 사람.
기억 뒤로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로렌츠 아르벨, 아르벨론 제국의 황태자.
소설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되는 황태자의 이름은 너무 잘 알았다.
만약 여기가 그 책이라면. 그 황태자는, 오늘 오후에 이 집에 올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엘?”
오빠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숟가락을 들고 가만히 있잖아.”
나는 식어가는 수프를 한 입 삼켰다. <반역을 막으러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습니다>의 무대는 황궁이다. 그 책에서 황태자는 아버지를 잃고, 그 죽음의 범인으로 몰린다.
아직 어느 책인지도 몰라.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결론부터 내리는 건 마감에 쫓기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아직 나에게는 두 계절이나 남아 있었다.
로렌츠는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 왔다.
창밖으로 문장 없는 검은 마차가 들어왔다. 마부의 등은 지나치게 곧았고, 뒤따르는 두 기수의 간격은 자로 잰 듯했다. 문장을 지운다고 지워지는 신분이 아니었다.
현관에서는 아버지가 격식대로 맞았다. 로렌츠가 사적인 방문이라며 예를 물리자, 아버지는 응접실까지만 배웅하고 물러났다.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지런히 빗은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엘.”
로렌츠가 나를 한 번 보고 웃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뵙네요, 전하.”
“많이 회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가 향이 약한 흰 꽃다발을 내밀었다.
“방으로 옮길 때는 지난번처럼 창가에 둬. 침대 곁은 향 때문에 머리가 아플 테니까.”
그 말에 황궁 도서관 뒤편 계단이 떠올랐다. 어린 나는 오빠와 로렌츠 사이에서 몰래 가져온 과자를 먹고 있었고, 내가 재채기하자 로렌츠가 꽃병을 치워주었다.
“사고 뒤에는 기억이 고르지 않다고 하던데.”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요. 함께 있었던 일은 가끔 늦게 떠오르고요.”
“그럼 나는 어느 쪽이야?”
웃으며 묻는 말이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눈은 웃지 않았다.
“도서관 뒤 계단에서 꽃병을 깨뜨린 쪽이요.”
“그건 에드윈이었어.”
“깨뜨린 건 오빠였고, 도망가자고 한 건 전하였잖아요.”
로렌츠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기억하네.”
“제가 혼자 남아서 혼났던 것도요.”
“그건 네가 계단 밑에 떨어진 과자를 주우러 돌아갔기 때문이지.”
“어린애를 두고 먼저 도망간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로렌츠가 웃으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오빠는 로렌츠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맞은편에 앉았다.
“온다고 했으면 나부터 찾을 것이지.”
“네 얼굴은 어제도 봤잖아.”
오빠가 과자를 고르며 말을 이었다.
“얘가 어제 첫 외출을 허락받고 운하 남쪽 공방 구역까지 가버렸다?”
“상점가 밖으로는 안 나갔다니까?”
“상점가 경계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더 무서워.”
로렌츠가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아무 데도 가지 마, 엘. 말도 타지 말고. 담도, 지붕도.”
“다들 왜 그 말만 해요?”
“네가 두 달 동안 누워 있는 걸 봤으니까.”
로렌츠의 시선이 잠시 비껴갔다. 뒤이은 말은 조금 낮았다.
“깨어나는 건 못 봤고.”
농담으로 넘길 틈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그때 하인이 붉은 밀랍으로 봉한 하늘색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뭔데요?”
“직접 가져올까 했는데, 어머니가 손으로 써서 따로 보내야 한다고 하셔서.”
봉투 위에는 아르벨론 황실의 태양 문장이 찍혀 있었다.
“어머니께서 겨울 구휼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작은 자리를 여실 거야. 물자와 기금을 댄 가문, 상단과 교단 관계자를 부르는 모임이지.”
“자선 연회 말씀이세요?”
“네 회복 소식을 들으시고 직접 초대하고 싶어 하셨어. 몸이 괜찮다면 와.”
나는 찻잔 위로 시선을 내렸다.
황궁. <반역을 막으러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습니다>의 무대가 되는 곳.
여기가 그 소설이라면 결국 한 번은 들어가 봐야 할 곳이었다.
“연회가 부담되면 무리할 필요 없어. 어머니껜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아니요. 갈래요.”
대답이 빨랐던 모양이다. 로렌츠는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무리하지 않을게요.”
“그 말은 예전에도 잘 안 믿었는데.”
로렌츠는 어릴 때부터 오빠의 몫까지 나를 챙기곤 했다. 내가 두 달 만에 깨어난 지금은 그 버릇이 조금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상단 일을 본다는 애가 이렇게 신용이 없어서야. 베르디안의 앞날이 어둡네.”
오빠가 혀를 찼다.
“내가 오빠보다 장부 훨씬 잘 보거든? 운임 정산도 맨날 틀리는 주제에.”
“그래도 거래처에서 값을 깎는 건 내가 너보다 잘해. 로렌츠, 네가 말해봐.”
로렌츠가 웃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협상은 에드윈이 잘했지.”
“거봐, 들었지?”
오빠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보았다.
“상대가 지쳐서 포기할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협상이라고 부른다면 말이지.”
“야!”
“말씀을 삼가시죠. 베르디안 소가주.”
웃음기 남은 녹색 눈이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듯 잠시 머물렀다.
문득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했다. 이런 마음이 들어도 되는지는 몰랐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닌데. 기억만 내 것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원래의 엘레인이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는지,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 마음은 진짜였다.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로렌츠가 아버지를 잃고 반역자로 몰리는 소설의 황태자가 아니기를.
가장 좋은 건 이곳이 어느 책도 아닌 것이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국경을 건너온 신부>이기를 바랐다.
그 가능성을 확인할 단서는 북문 물류창고에 있었다. 행선지가 비어 있던 여섯 건의 주문.
북문 창고에서 물건이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