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비어 있는 행선지
커튼 틈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아직 초가을의 빛이 남아 있었다. 창가에서는 노라가 꽃병의 물을 갈고 있었다.
흰 과꽃이었다.
“이 꽃이 향이 은은해서 좋은 것 같아요. 아르벨 중앙 온실에서만 나는 거라 그럴까요?”
아르벨은 이 제국 황실의 이름이었고, 베르디안은 황실에 물자를 대며 후작가까지 올라온 집이었다. 이 집의 장남인 오빠는 어릴 때부터 황태자의 배동으로 자랐다.
어쩌면 이곳은 <반역을 막으러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습니다>일까.
“그 꽃은 누가 가져온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가져오셨어요. 누워 계실 때도 몇 번이나 다녀가셨는걸요. 동부 순행 때문에 당분간은 못 오시게 됐지만요.”
그 소설에서는 황태자비 간택이 열리고, 숙부에게 가문을 빼앗긴 백작 영애가 후보로 입궁한다.
이른 봄에 황제가 독살당하고, 그 죄는 황태자에게 씌워진다. 소설 속에서 황태자는 백작 영애의 도움을 받아 누명을 벗고 황제가 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하지만 그 해피엔딩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몰락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황태자의 배동을 소가주로 둔 가문은 무사할 수 있을까.
차라리 여기가 <국경을 건너온 신부>인 편이 나을지도 몰라.
서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국경의 교역로가 제일 먼저 닫히게 된다. 제국 서북부를 오가는 물자의 대부분을 취급하는 베르디안 상단은 그 타격을 피할 수 없겠지만, 미리 안다면 대비할 수 있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 소설을 고르고 있었다. 고른다고 그게 맞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전쟁이라면 추적은 더 쉬운 쪽이니까.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는 군량과 말 먹이, 방한복과 램프유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전쟁은 겨울에 시작된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내 손에는 그게 언제의 겨울일지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단서가 있었다.
베르디안 상단의 장부.
전쟁이 이번 겨울이라면 평소와 달라진 숫자 하나쯤 이미 장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라, 아버지가 가져다주겠다고 한 장부 말이야. 본점에 들어온 주문이랑 서부행 물량부터 보고 싶다고 전해줄래?”
“벌써요?”
노라는 못 미더운 얼굴을 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밀린 장부가 방에 들어온 것은, 혼자서도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된 이튿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서류보다 먼저 내 얼굴을 살폈다.
“두 달이나 누워 계셨던 것 치고는 얼굴이 썩 나쁘진 않군요.”
토비아스 레번.
베르디안 상단의 부단주이자 아버지의 가장 오래된 오른팔.
“눈을 뜨자마자 또 장부부터 찾으시니, 숫자 보는 법을 가르쳐드린 제가 후작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토비아스가 탁자 위에 서류 묶음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 봉지가 하나 더 놓였다.
“남부에서 어렵게 구한 무화과 꿀절임입니다. 상처가 빨리 아물고 기력이 붙는다나.”
“그 말을 믿으세요?”
“그래도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건 압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본점에서 접수된 주문만 가져왔습니다. 서부행 물량도 평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부 국경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나요?”
“조용합니다. 드라벤 왕국과는 옛날에야 치고받았지, 요즘은 혼삿말이 나오는 중이니까요.”
토비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혼사요?”
“드라벤 왕녀가 특사로 헤스턴 공작령에 와 있습니다. 공작이 아직 혼인 전이니 사교계에서는 국혼이 나는 게 아니냐고 떠들썩하고요.”
헤스턴 공작.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국경을 건너온 신부>에서도 서부의 젊은 공작은 혼인 전이었다.
드라벤 왕녀가 화친혼을 위해 국경을 건너오고, 왕녀를 빼앗겼다고 여긴 남자가 그녀를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이야기의 시작은 닮아 있었다.
“공작은요?”
“서부에 박혀 있죠. 수도에 얼굴을 안 비친 지 몇 년째인데요.”
나는 장부를 열어 품목별 집계를 펼쳤다.
모직도, 보존식도, 램프유도 평년 범위 안이었다. 몇 장을 더 넘겨 개별 주문서가 묶인 부분으로 들어갔다.
그중 하나에서 손이 멈췄다.
노르델산 이중기모 모직. 염색 전 상태 유지. 발주처 지정 운송인.
“색을 들이지 않고 가공을 하는 경우가 있던가요?”
토비아스가 주문서를 들여다봤다.
“보통은 색을 정한 뒤 가공소로 넘깁니다. 다만 정해진 색을 정확히 맞춰야 할 때는 생지로 가공한 뒤 따로 염색하기도 하죠. 이 정도라면 소규모 맞춤 주문일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 몇 장 뒤, 다른 명의의 주문서에서 똑같은 가공 지시가 나왔다.
두 번째, 세 번째.
“올겨울 물량 계약은 언제부터 들어와요?”
“다음 달은 되어야 움직이죠. 지금 들어오는 건 급한 곳들뿐입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명의는 모두 달랐지만 가공 지시가 모두 같았다. 하나의 주문을 여섯 건으로 나눈 것이다.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주문들이었다. 하지만 명의와 접수일을 지우고 물건만 남기면 달라졌다.
수량을 합치면 겨울 외투 3천 벌 분량. 군용으로나 쓸 법한 물량인데도 최종 행선지가 전부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장부를 덮었다.
“가공은 어디에 맡겼죠?”
“이 주문이라면 아르덴 거리에 있는 하벨 직물점이겠군요.”
베르디안의 장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실제 행선지는 하벨의 장부를 봐야만 알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볼게요.”
내가 순순히 장부를 내어주자 토비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고 전에도 오늘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장부는 여기까지만 보겠다고 하시고는 직접 확인하러 말을 타고 나가셨죠.”
“말을 타다 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죠.”
“그날 말은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평범한 낙마는 아니었죠.”
토비아스는 무언가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후작님께서 이 장부를 허락하신 건 익숙한 일을 하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입니다. 이번에는 장부에서 끝내십시오.”
“장부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면요.”
토비아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아버지는 외출을 허락했다. 노라와 호위를 데려가고, 아르덴 상점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마차 안에서 노라는 내 머리카락을 두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상점가 밖으로는 안 가실 거죠?”
“갈 이유가 없잖아.”
노라의 손이 멈췄다.
“이유가 생기면 가시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마차가 먼저 멈췄다. 하벨 직물점이 있는 아르덴 거리 끝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막 떠나려는 손님 둘이 보였다.
“그럼 세 건 모두 여기서는 끝난 거군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여주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스물둘셋쯤으로 보이는, 단정한 여행복 차림의 남자였다.
“저희 손을 떠난 지 열흘이 넘었어요. 그다음은 카렌에서 확인하셔야 할 거예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반걸음 뒤에 선 남자는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린 뒤였다.
짙은색 외투에 검을 찬, 무엇을 하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검은 머리는 창의 빛을 받고도 갈색으로 풀리지 않았다.
높은 콧대와 색이 옅은 입술, 표정이 거의 없는 얼굴. 키가 컸고, 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내 곁을 지나쳤다.
계산대 뒤에 있던 하벨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베르디안 상단에서 왔습니다. 지난달 가공을 맡긴 노르델 모직 여섯 건요.”
나는 본점의 소개장을 내밀었다.
닫히던 문 위에서 종이 한 번 더 울린 것은 그때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문밖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은 소개장에 잠시 머물렀다가 내 얼굴로 올라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무언가를 확인당한 느낌이 남았다.
“잊으신 게 있으신가요?”
하벨 부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다음에 다시 오죠.”
종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하벨 부인은 장부를 꺼내면서 계산대 한쪽에 밀어둔 종이 세 장을 함께 집어 왔다. 아까 그 사람들이 보고 간 것도 이 주문이었다.
“여기 있네요. 여섯 건이 모두 카렌에서 한꺼번에 묶어 나간다고 하더군요.”
나는 인계 날짜와 수량을 옮겨 적으며,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바로 찾으시네요.”
“방금도 찾아본 거라서요. 서부 구호소로 갈 물건이 아직 안 왔다고, 닷새 만에 같은 걸 두 번이나 물으시지 뭐예요.”
행선지가 전부 비어 있던 주문이었다. 그 행선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닷새 사이 두 번 다녀갔다.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아시나요?”
“그다음은 카렌에 직접 물어보셔야죠.”
그들이 이 주문을 꾸민 쪽인지, 나처럼 쫓는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도 나도 다음 목적지는 같았다.
운하 남쪽 물가 구역의 카렌 가공소.
아버지는 상점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상점가가 어디서 끝나는지는 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