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칼릭스 헤스턴과 엘레인 베르디안
나는 카일이라는 이름은 믿지 않았지만,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은 믿었다.
둘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카일을 믿게 된 데 거창한 계기 같은 건 없었다. 같은 것을 찾고 있다는 걸 안 뒤로 몇 번인가 마주 앉았고, 그는 그때마다 한 말을 지켰다.
무엇보다 오늘 밤 그에게 부탁하려던 일에는 진짜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황궁의 제한구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경비의 동선과 잠긴 문을 함께 확인해줄 사람. 내게 필요한 것은 그의 신분이 아니라, 정해둔 때에 약속한 몫을 해내리라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막상 황궁에서 마주친 카일은 평소와 달랐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뒤쪽의 벽등 때문에 그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반듯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 아래로 익숙한 청회색 눈이 보인 뒤에야 걸음을 멈췄다.
“카일 경?”
그도 같은 순간 멈췄다.
평소와는 다른 차림이었다. 목을 높게 감싼 검은 제복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흐트러짐 없이 떨어졌다.
“베르디안 영애.”
낯선 것은 차림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도 있어요. 오늘 밤 계획을 조금 당길까 하는데요.”
“먼저 들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도에서 누군가를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제 이름은 카일이 아닙니다.”
옆으로 내린 그의 손이 느리게 쥐어졌다가 펴졌다.
“제 진짜 이름은……”
그때 문이 열렸다. 궁정 시종 하나가 들어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헤스턴 공작 각하, 여기 계셨군요. 의전관이 입장 순서를 여쭙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과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사이에 아주 짧은 공백이 있었다.
헤스턴 공작. 칼릭스 헤스턴.
그 이름을 알고 나자, 함께 보낸 시간 속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실마리는 처음부터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가리키는 답을 몇 번이나 지나쳤다.
알아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모르는 채로도 그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도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졌다.
“곧 가도록 하지.”
“예, 각하.”
시종이 물러났다. 그는 닫힌 문을 한 번 보고 나를 돌아보았다.
“직접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방금 전에요?”
“영애.”
나는 손을 반쯤 들었다.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순서를 정할게요.”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 할 일은 그대로 해요. 그건 각하가 카일이든 헤스턴이든 안 바뀌니까요.”
각하.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이상했다.
그를 믿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전처럼 카일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전처럼.
그 말이 어디를 건드렸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는 없죠, 헤스턴 공작 각하.”
그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이제 전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정체를 숨겨서인지. 내가 알아채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남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내가, 그에게 화를 낼 자격은 없어서인지.
엘레인 베르디안.
낯선 몸에서 깨어나 그 이름에 막힘없이 대답해버린 것이,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천장이 낯설었다.
격자로 짜인 우물천장이었고 칸마다 금박 몰딩이 들어가 있었다. 네 기둥 침대의 휘장은 걷혀 있었다. 방 안에는 약초와 오래 말린 꽃 냄새가 층층이 배어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에 누군가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눈가가 붉었고 물그릇을 든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엘레인 아가씨. 저 보이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이 낯설다거나 목이 잠겨서가 아니었다. 저 얼굴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저 애가 울기 직전에 아랫입술 안쪽을 깨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나왔다.
“……노라.”
소녀가 물그릇을 놓쳤다.
그 다음은 소란스러웠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부부와 젊은 남자가 침대 곁으로 몰려들었다. 가죽 가방을 든 의사가 그들을 물렸다.
“낙마하시고 두 달 만에 깨어나신 겁니다.”
두 달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분명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있었다.
시험과 졸업이 있었고, 전략 컨설턴트라는 첫 명함을 받은 날이 있었고, 밤을 새운 회의실과 끝나지 않던 장기 프로젝트가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자료 더미 위로 시야가 하얗게 꺼지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이었다. 빙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맥을 짚던 의사가 물었다.
“이름과 나이를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엘레인 베르디안, 열아홉 살이요.”
대답은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침대 곁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디안 후작가. 아버지 레이먼드, 어머니 아델라, 세 살 위의 오빠 에드윈.
입 밖에 내고 나서야 내가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시는 게 언제입니까?”
그 질문에만 대답이 늦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현실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말할 수 있는 답은 아니었다.
이 몸의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사고 언저리는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렸다.
“……말을 타고 나갔던 것까지요.”
의사는 잠시 생각한 뒤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기억이 당분간 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곧바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사람과 장소는 알아도 함께 겪은 일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래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직후에는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면 기억도 차차 이어질 겁니다.”
그러자 오빠가 물었다.
“선생이 말한 익숙한 생활에 마구간도 포함됩니까?”
의사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한동안은 말을 타시면 안 됩니다.”
“창고는요?”
“에드윈.”
아버지가 낮게 제지했다. 하지만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엘에게 평소라고 하면 창고와 마구간부터니까요.”
오빠가 의사에게 설명하듯 덧붙였다.
“담장과 지붕도 빼주셔야겠군요.”
어머니가 젖은 눈가를 누르면서도 말을 보탰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장부는 네가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때 방으로 가져오게 하겠다. 직접 내려갈 생각은 마라.”
“……네.”
짧은 침묵 끝에 순순히 대답하자 어머니가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가족들은 내가 무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안도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시간을 벌었다. 기억은 기다려야 하지만 정보는 지금부터 모을 수 있다.
다행히 정보는 침대에서도 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차지한 이 몸 자체가 유용한 정보였다.
석류빛 머리와 올리브색 눈, 살짝 올라간 긴 눈매와 곧은 콧날. 객관적으로 말하면 꽤 미인이었다. 만약 여기가 소설 속이라면 여주인공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켜켜이 쌓인 기억도 불빛이 켜지듯 빠르게 돌아왔다. 호칭과 예법은 생각하기 전에 입과 몸이 먼저 알았다.
기억이 돌아올수록 주변에서 주워 모은 조각들도 하나씩 이어졌다.
문 너머로 오가는 하인들의 말, 어머니가 전해주는 집안 이야기, 아버지와 오빠가 목소리를 낮춰 주고받는 상단 일.
그렇게 사흘 동안 짜맞춘 정보로 내가 알아낸 것은 베르디안이라는 가문이 어느 소설에 나오는지가 아니었다. 이 세계를 이루는 이름들이, 한때 표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두 작품과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반역을 막으러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습니다>와 <국경을 건너온 신부>.
두 소설의 스토리는 전혀 달랐지만 배경이 되는 제국, 지명, 명문가까지 세계의 뼈대가 기묘할 만큼 일치했다.
그 시절의 화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란히 붙은 두 표지와 끝없이 내려가던 비교표, 그 아래의 댓글들.
“비교표 보고 옴. 지명 한두 개면 우연이라 쳐도 가문에 황족 이름까지 겹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둘 다 정주행했는데 진짜 완전 다른 소설임. 하나는 반역이고 하나는 전쟁인데 뭘 베꼈다는 거야ㅋㅋ”
나는 열혈 독자가 아닌 논란의 구경꾼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겹도록 본 줄거리와 설정은 머리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베르디안은, 사흘을 되짚어봐도 어느 쪽에서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레인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두 소설까지는 알아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여기는 반역일까, 전쟁일까.